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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드라마

더 글로리

 소설이든 글이든 이야기를 쓸 때면 초반에 독자를 휘어잡으라는 공식은 다들 익히 알 거다.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인기를 끌었던 <스카이 캐슬>은 1화에서 서울대를 보낸 엄마가 자기 스스로 총을 쏴서 자살한다. 눈 쌓인 겨울 맨발로 걸어 나가 자기 목에 사냥총을 들이대는 장면. 흰 눈에 피가 떨어지는 것. 시청자의 호기심을 돋우기에 충분히 자극적이다.

 <더 글로리> 역시 이 공식을 쓰고 있다. 1화에서 아주 끔찍한 고데기 씬들이 등장하며 우리들 마음에 분노를 일으킨다. 섬뜩한 장면들에 견디기 힘들지만 2화부터 시작되는 어른 문동은의 복수가 어떻게 진행될지 더 관심이 가게 된다. 그 기세로 시즌1은 대박을 쳤다. 

 

8화까지는 문동은이 어떻게 18년이란 시간 동안 복수를 준비해 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 고통의 시간을 견뎠는지를 보여준다. 박연진이 문동은의 집에서 남편을 만나는 게 8화의 마지막 씬이다. 다시 말해 박연진이 그 집까지 가게 되는 과정이 곧 8화까지의 내용이다.

 손명오를 이용해 모든 인물들을 자기 계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가장 큰 가해자인 박연진을 바둑판 위로 올리기 위해 남편을 이용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내 꿈은 오늘부터 너야, 박연진."라는 대사를 할 때부터 박연진이 자기 사진으로 가득한 집에 들어갈 때까지 이어지며 숨통을 조인다. 마치 박연진이 된 거처럼 막막한 상황들이 극을 고조시킨다. 거기다가 아직도 밈처럼 떠도는 <더 글로리>의 대사들은 드라마를 더욱 빛나게 했다. 고심해서 쓴 대사라는 생각이 들 만큼 인물들끼리의 기싸움이 치열했다.

 애써 감추려 했지만 조여 오는 문동은의 복수에 담뱃불을 던지며 욕설을 내뱉는 박연진. 무릎 꿇은 최혜정과 이혼을 원하는 전재준은 가해자의 연대가 얼마나 하찮은지 잘 보여준다. 자기들의 아지트에서 이사라, 전재준, 박연진이 서로 엇나가는 말들만 던지는 씬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8화까지는 이런 팽팽한 긴장감들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시즌2라고 공개한 9화부터의 내용에서는 이때까지 이어오던 긴장감을 풀어버린다. 그도 그럴 게 손명오의 죽음을 다시 파헤쳐가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문동은의 18년이 쉬지 않고 달려왔듯이 이야기도 쉼 없이 촘촘히 이어졌다. 문동은이 복수를 통해 돌려받고 싶은 건 그들의 사과 따위가 아니다. 다만 열여덟 살.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던 자신의 삶을 서른여섯의 문동은이 돌려주려는 것이다. 그러니 이야기도 이제는 되감기를 하는 것이다. 직접적 증거가 되지 않는 자기 명찰 때문에 과오를 덮기 위해 손명오를 죽인 박연진처럼. <더 글로리>의 시즌2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그때 잃었던 영광을 조금이나마 되찾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문동은과 가해자 간의 팽팽한 기싸움 같은 것에 치중하기보다는 복수에 박차를 가한다. 가해자들은 스스로 자멸하고 서로를 찌르고 해친다. 굳이 문동은이 나서지 않아도 느슨한 가해자들의 연대가 끊어져버린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폭로하며 빛을 잃어간다. 혹자는 우연에 기댄 복수 진행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사라가 최혜정의 목을 찔러서 대신 해결 되는 일. 박연진의 엄마가 스스로 겁을 먹고 문제를 키우는 것. 최혜정이 열등감과 복수심에 전재준을 대신 복수해 주는 것. 모두 신이 문동은을 돕듯이 일이 잘 진행된다. 이것들은 작가의 염원 같은 거라고 본다. 가해자들이 신에게 천벌 받기를. 신이 있다면 문동은과 같은 피해자를 위해 좀 일하라고 말이다. 

 시즌 2는 평가가 속 시원한 복수극이라 좋다는 쪽이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우연에 기대고 인물들을 너무 단면적으로 그렸다고 느낀 사람들은 30% 내외라고 생각된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죗값을 받는 게 <더 글로리>의 주제라면 이 전개가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박연진을 비롯한 가해자 연대는 그때 잃어야 했던 빛을 지금이라도 잃은 것이니 말이다.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이야기 후반부가 '시원한 복수'에 너무 초점이 맞춰져서 이야기가 긴장감을 잃었다. 뭐가 그렇게 쉬운지 일들이 척척 해결된다. 거기다가 문동은이 경찰에게 이것도 "문제가 되나요?"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건 피해자에게 주는 면책처럼 보인다. 학교 폭력을 다루는 드라마니까 문동은 역시도 결국 괴물에게 맞서는 괴물이 된 게 아니냐 하는 비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너무 과하게 당당한 장면들을 넣은 것은 좋지 않아 보인다. 문동은이 자살할 장소를 주여정의 엄마가 알아내서 온 것도 개연성이 부족해 보인다. 윤소희 친모에게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와봤다,라는 거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급한 느낌이 난다. 

 주여정이라는 인물의 엄청난 비현실성이 극의 몰입을 깬다. 결국 마지막에 문동은이 자신을 이용할 것임을 알고 준비했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개연성을 무너뜨린다. 차라리 문동은과 바둑을 두면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복수에 동참할 공감을 얻었다,라는 설정이 더 맞아 보인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는데 대체 왜 자기 쓰임을 기다렸다는 건지. 자기 아버지의 죽음으로 살인자나 가해자들에 대한 복수심을 가진 여성을 돕고 싶어서? 캐스팅적으로 이도현이 외적으로 매칭이 안 되는 것도 한몫을 하지만 인물 설정 자체도 이질감이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김은숙 작가가 늘 보여주는 로맨스를 마음껏 뽐내는 도구처럼 보인다. "할게요, 망나니."라든가. "명을 받잡겠습니다." 같은 표현들은 작가 개인의 욕심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즌1에 비해 대사에 임팩트가 떨어진다. 복수에 사용되는 도구들이 대체로 SNS이거나 USB에 담긴 영상들. 혹은 녹음파일 같은 것들이고. 그것들을 서로 교환하거나 들려주며 문동은의 판이 짜 맞춰지는 데 이야기가 쏠려 있다. 8회까지의 대사들이 그토록 많이 패러디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배우가 내뱉는 대사들이 다 힘이 실려 있고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9화부터의 대사들은 힘이 떨어진다. 모든 계획이 잘 풀리고 박연진이 어떻게 추락할지에 초점이 가 있다. 그래서 문동은의 말이 이전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주목받을 일이 없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물 흐르듯이 잘 봤다. 그런데 8화까지의 내용에 비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복수가 잘 되었다,라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