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1학년 때였다. 윤리 선생님이 출석부에서 내 번호를 불렀다.
"지금이 일제강점기고, 네가 만약에 일본인이라면 조선인에게 밥을 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때 일본인은 조선인에게 적대감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조선인을 돕고 싶은 일본인이란 가정이 있었다.
"개인이 광복을 당장 이룰 수는 없고 당장 하루를 살 수 있는 밥을 주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나마 가장 나은 답이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었었다.
1. 조제라고 불러 줘.
쿠미코는 장애를 가진 여성이다. 하반신을 가눌 수 없어서 의자에서 내려올 때도 쿵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떨어뜨려 버린다. 고아원에서 탈출해서 혈육에게 와서 살만한가 했더니 삶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고. 할 수 있는 거라곤 새벽에 몰래 유모차를 타고 할머니와 산책하는 것뿐. 방에서는 온종일 남이 버린 헌책을 읽어야만 한다. 츠네오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언제나처럼 올라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툭 떨어지고 만다. 삶이 온통 심연 속과 같다. 그런 그녀를 최대한 수면 위로 끌어올려 준 것도 츠네오다.
할머니의 과도한 보호로 아기가 타는 유모차에 실려 다니던 쿠미코의 장막을 들추는 첫 번째 남자. 츠네오. 그는 쿠미코에게 매력을 느끼고 계속해서 접근한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가 곧 잠자리를 원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섹스 파트너를 두고 있으면서 카나에에게까지 접근한 츠네오라면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딱히 미래를 대단히 신경 쓰지도 않고 밤에 마작판을 벌이는 곳에서 웨이터를 보는 인물이니 말이다. 츠네오를 조금 더 거칠게 그려냈다면 건달스러운 인물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먼저 허락한 것은 쿠미코다. 떠나지 말라고 붙잡은 일도 섹스를 허용한 일도 모두 그녀의 선택이었다. 하고 싶었을 것이다. 츠네오도 쿠미코도. 서로의 외모에 매력에 끌렸으니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출발점을 아름다운 20대 남녀의 섹스로 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츠네오는 장애인 여성을 가지고 논 쓰레기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쿠미코는 츠네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조제'라고 소개한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속 '조제'는 외로움과 이별에 담담한 인물이다. 쿠미코는 그런 조제가 되고 싶은 바람을 담아 자신을 새로이 정한 것이다. 그러니 츠네오와 조제의 만남은 처음부터 장애인 여성에 대한 동정 같은 것으로부터 시작한 게 아니다. 외적 아름다움과 성적 호기심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쿠미코는 더욱더 잘 알고 있다. 언제 의자에서 또 떨어져야만 하는지.
2. 무서운 호랑이.
"괜찮아, 해도 돼." 쿠미코가 츠네오에게 관계를 허락할 때, 한 말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츠네오가 어떤 남자인지. 왜 자기를 찾아오는지. "난 옆집 변태 아저씨랑 달라."라고 츠네오가 말하자 쿠미코는 뭐가 다르냐고 반문한다. 가슴을 만지게 해 주면 쓰레기를 버려준다는 옆집 남자나 섹스를 하고 싶어서 내 곁에 (잠깐) 남겠다고 약속하는 남자. 쿠미코에게는 곧 내려가야만 하는 땅바닥, 심연, 어둠과 다를 바가 없다.
둘은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본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호랑이를 보러 오고 싶었다는 쿠미코. 옆집 변태 남자와 츠네오의 다른 점. 어차피 내려가야 할 의자인 대상은 같지만 자신이 좋아하느냐 하는 쿠미코의 마음이 다르다. 그래서 쿠미코가 "고마워해라."라고 역설적인 말을 하자 츠네오가 "내가?"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1년 후. 츠네오는 부모님에게 쿠미코를 소개할 거라고 동생에게 말한다. 그 다짐은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지고 둘의 이별 여행으로 바뀐다. 현실은 호랑이처럼 무섭다. 철창 안에 가둬 놓은 맹수를 보고 귀엽다고 했다가 그것을 막상 마주하려 하면 몸이 굳어버린다.
3. 다시 물고기들 곁으로.
부모님에게 인사를 가지 못한 둘은 바다를 보러 가자며 떠난다. 그리고 밤이 되고 물고기 그림이 그려진 간판을 보고 모텔을 들어간다. 비록 진짜 물고기가 있는 수족관은 들어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부모님을 보러 가겠다고 했는데 가지 않을 때. 쿠미코는 직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츠네오와의 이별이 곧 온다는 사실을. 그래서 수족관 앞에서 그렇게 아이처럼 떼를 쓴 걸까. 다시는 호랑이를 같이 볼 수 있는 사람과 물고기를 보러 올 일이 없을 거 같아서.
마지막 섹스를 손을 묶고 한 것도 'SM'이라는 게 둘의 추억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동네에 살고 있는 한자도 똑바로 못쓰는 천치가 몰래 보던 잡지를 보고 낄낄 댔던 기억. 최고의 섹스를 선사하겠다는 쿠미코. 단순히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둘을 다시 만나게 해 준 것도 그 SM잡지다. 혹은 매일 하던 섹스에 질린 츠네오가 새로운 섹스로 인해 자기 곁에 조금이나마 머물게 하려고 한 노력이었을지도.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바다 밑에서 데굴데굴 계속 굴러다니게 되겠지."
"그런데 그것도 나쁘진 않아."
그리고 몇 달 후 둘은 담담한 이별을 맞이한다. 싸움이나 눈물도 없이. SM잡지를 선물로 건네면서 말이다. 처음 웃음 틔게 했던, 다시 만나게 했던, 너를 붙잡으려 했던 그 모든 것이 담긴 잡지를. 이제는 너를 보내면서 건넨다. 츠네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카나에와 길을 가다 주저앉는다.
조제는 이제 휠체어를 타고 장도 보러 다닌다. 예전처럼 옆집 변태 남자에게 부탁하거나 도우미가 오기만을 목놓아 기다리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온 조제가 그 의자에 앉아 요리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 다이빙을 한다. 풍덩. 카메라는 아래로 조제를 비추지 않는다. 마치 더 이상 가라앉는 일은 없다는 듯.
그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일까. 그녀는 길 잃은 조개껍데기가 된 걸까. 아마 아니라고 생각한다. 깨진 조개껍데기도 모래사장에서 빛이 나니까.
ㅡㅡㅡㅡ
* 왓챠에 들어가서 평을 봤더니 추천 수가 꽤 많은 리뷰가 있었다. 1점을 준 그 평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자 감독의 여성 혐오와 더러운 취향이 듬뿍 담긴 역겨운 영화라고.
첫째, 쿠미코를 로리타처럼 만들었다.
1. 유모차. 2. 여행을 가서 어린아이 같은 어리광. 내비게이션을 보고 과할만치 신기해하는 것.
이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둘째, 왜 츠네오의 환승이별에 여성끼리 담판 짓는가.
셋째, 옆집 변태아저씨의 성적 발언.
넷째, SM 같은 변태적 성향.
다섯째, 강아지가 처녀가 아니다는 발언을 하며 키우지 않겠다는 인물.
첫째,
쿠미코를 로리타처럼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반박할 게 많다. 애초에 집에만 있었던 인물이고 자신도 말하듯 심연 속에 갇힌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유모차를 타고 할머니에게 보호받는 것은 과한 보호로부터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상징이다. 그 장막을 츠네오가 처음 열어주었지만 할머니의 차단 때문에 결국 중간에 헤어짐이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할머니가 그녀를 보호함과 동시에 세상과 단절시켰음을. 내비게이션은 집에서 헌책만 보는 그녀가 볼일이 없는 물건이다. 그러니 신기해할 만하다. 그리고 어리광은 수족관에 가지 못했을 때, 한 번 나오는데. 그거 가지고 로리타 같다고 하는 건 억지라고 보인다. 또 그 어리광은 단순히 어리광이 아니라. 정말 엄청난 실망이다. 츠네오처럼 자신을 업고 이곳저곳 다녀 줄. 호랑이를 보는데 같이 손을 잡을 그런 남자를 또 만나기가 쉬운 일이겠나.
둘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그 언덕을 혼자 오를 수 없는 쿠미코가 옆집 아이의 도움으로 약속 장소로 나간다. 그 말은 츠네오는 모르게 카나에가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카나에는 복지에 관심을 가지던 여성이고 마음이 여린 인물이다. 그래서 뺨을 때리고 나서 자기는 맞지 않아도 되지만 맞아주는 배려까지 보인다. 그런 마음씨 좋은 카나에가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옹졸하게 장애인을 불러내서 화풀이를 하려 하니 츠네오가 당연히 몰랐으면 하는 거다. 그러니 츠네오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건 한참이나 뒤가 된다.
물론 츠네오가 내레이터 일을 하는 카나에를 굳이 찻집까지 데려가서 대화를 하는 건 이해가 쉽지 않다. 어쩌면 그 둘은 그때부터 새로운 만남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이미 일 년이나 쿠미코를 만났고. 동생의 말처럼 츠네오는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만으로 성적 매력만으로 그것들을 감당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므로. 그런 선택들이 쓰레기라고 비난한다면. 츠네오는 쓰레기가 맞다. 그런데 장애 여성이라고 해서 자신에게 지쳐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남자를 만나지 않을 세상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영화에 그런 쓰레기가 나오는데 왜 옹호하냐 물어보면 글쎄다. 그게 그 영화고 그냥 그런 나쁜 인물도 등장할 수 있는 게 이야기니까. 그거 자체를 부정하면서 영화가 쓰레기냐 한다면 그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셋째,
옆집 아저씨는 그냥 찌찌 만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는 지질하고 모자란 놈이다. 그 인물이 어린아이에게 그런 발언을 하는 건 분명 도덕적으로든 뭐든 옳지 못하고 더럽다. 그런데 그게 마치 감독이 그런 걸 원한다거나 여성혐오가 가득하다고 평가하는 건 비약적이다. 못 사는 동네에 변태아저씨까지 사는 처참한 쿠미코의 삶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 장치로 보일 뿐이다.
넷째,
SM은 계속해서 말했지만 둘의 웃음이고 추억이다. 그리고 둘을 다시 만나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고. 마지막에 쿠미코가 눈을 가리고 손을 묶인 채 SM을 하는 건 강간을 당한 게 아니라 그녀의 선택이다. 그리고 옆집 아저씨에게 자신의 가슴을 만지게 해 주듯 SM적 섹스를 통해 츠네오의 환심을 좀 더 사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그게 감독의 성적 취향을 드러낸다고 비난한다면 그것 역시도 비약이다.
여기서 SM잡지를 보던 후배가 츠네오에게 선배도 교복 입은 여성을 좋아하냐고 묻는데. 그건 일본에 깔려 있는 흔한 패티쉬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일본은 애니메이션만 보더라도 학원물이 많다. 이것 역시도 그저 그런 성향 패티쉬를 지닌 인물이 나올 뿐이다. 애초에 SM 잡지를 보는 인물이 교복에 패티쉬가 있는 게 그렇게 역겨울 일인가 싶다. 실존 인물들은 얼마나 더한 패티쉬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
다섯째,
이건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게 영화를 보는데 그렇게 눈에 띄어서 몰입을 방해할 정도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뭐 불편할 수도 있긴 하겠다만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보는 격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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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들만 눈에 들어와서 머릿속에 가득 차서 영화를 여성 혐오적이라고 봤다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호들갑이라고 여길 만도 하다. 그런데 결국 조제를 버린 환승이별남 츠네오라고 영화를 봤다면 그건 너무 비약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쿠미코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쿠미코는 자신을 '조제'로 별칭 했을 때. 마지막 다이빙 때 카메라가 여전히 의자 위. 수면 위를 비추었듯이. 여전히 츠네오를 기억하며 세상을 잘 살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유모차의 장막을 벗고 고맙지만 장애였던 할머니의 차단을 끊고 헤엄치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단순히 장애인에 대한 몰지각과 여성 혐오로 본다면. 그거야 말로 쿠미코를 다시 심연 속으로 돌려보내는 감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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