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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드라마

눈이 부시게 - 슬픈 청춘 예찬

  *** 이 글은 결말까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처럼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딸.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려고 시계의 시간을 수 천 번 되돌린 반작용으로 늙어버리고 만다. 가족들만 아는 얘기를 꺼내니 쉽게 믿어준다. 친구들 역시도 '혜자'를 그다지 의심하지 않고 친구로 받아들인다. 그중에 '이준하'에게만은 정체를 공개하지 않는다. 할머니인 모습이 되고 나서도 잊지 못하고 접촉하지만 저세계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닿을 수가 없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혜자는 할머니가 된 게 아니라. 진짜 할머니이고 알츠하이머에 시달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들이라고 불렀던 이들은 며느리와 아들이고 친구들은 늙은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하는 똑같은 할머니다. 

 드라마는 액자식 구성으로 알츠하이머에 걸린 혜자의 뒤죽박죽인 기억 속에서 하나의 우화가 탄생한다. 요양원은 효도원으로 이준하를 닮은 의사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둔갑해 버린다. 파편화된 기억 속에도 곳곳에 진실은 숨어있다. 아빠의 다리가 의족이었던 것. 경비원에게 말이 심하다며 엄마 행세를 한 것. 엄마와 함께 장을 보며 며느리라고 한 것 등. 치매 환자들이 실제로 오락가락하는 특징을 잘 담아내었다.

 할머니가 되기 전 혜자는 준하와 술을 마시며 "나는 내가 너무 애틋해. 나는 내가 너무 안타까워."라고 말한다. 백수인 주제에 자기를 애틋해하다니. 독자는 자기애가 넘치는 인물이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일찍 죽고 홀로 내상을 키워야 했던 혜자는 자기의 젊은 시절이 너무 애틋하고 안타깝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어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 손이 부르트도록 미용 일을 하거나 자기 자식에게 모진 말을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쁘게 생활하며 늦게 데리러 간 날. 하필 아들이 차에 치여서 다리가 다친 것도 모두 제 탓 같다. 그래서 눈이 오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아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그 앞길을 쓸었던 것이다. 

 극에서 시계는 판타지물에나 등장하는 도구처럼 나온다. 한 할아버지가 그 시계를 차고 있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람도 시계를 잘못 써서 늙어버렸나, 하고 의심하게 된다. 작가는 이를 유도하고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다. 그리고 혜자가 치매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가 과거에 남편을 폭행수사했던 나쁜 형사인 것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우화 속에서 혜자는 그 시계를 뺐으려 하다가 제지당할 정도로 집착한다. 아직 용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형사가 다 늙고 죽어가는 모습으로 흐느끼며 시계를 건네자 그것을 손으로 밀어버리며 받지 않는다. 사죄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용서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비약이다. 다만, 치매 속에서도 뚜렷하게 기억했던  '이준하'에 대한 집착을 이제 놓아주려는 것이다. 

 무심하게도 젊은 남편을 앗아간 세상에 대한 원망보다는 아름다운 기억들만 남기고 잊어가는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청춘으로 돌아간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걷지도 못하던 어린아이의 시절로. 아름다운 가정은 파괴되고 눈 뜰 새도 없이 바쁘고 아들은 다쳤는데도. 청춘은 왜 그다지도 눈이 부신지. 치매가 병이. 이상하게도 빛나는 시절로 혜자를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