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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간단 리뷰 (비프, 퀸메이커)

글을 위한 글 2023. 4. 20. 03:42

<성난 사람들> 원제 <비프>는 상당히 대중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가면들에게 바치는 솔직한 외침이다. 

 

'로드 레이지'로 불리는 보복운전성 운전싸움을 시작으로 극이 시작한다. 그렇게 엮이게 된 남녀가 서로에게 점점 과격한 복수를 이어가는 이야기다. 크게 보면 현대인이라면 가지고 있는 방향을 알 수 없는 분노에 대한 이야기고. 작게 보면 동양인 특유의 참는 문화에서 비롯된 화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각 화가 35분 내외로 길지 않아서 집중하기에 좋다. 소재 자체가 공감하기 어렵지 않다. 끔찍하다고 해야 할지 깜찍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복수들이 몰아치며 빠르다. 

 

극 중에서 "왜 동양인들은 유당 불내증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는 장면이 있다. 우유가 서양에서 주로 마시는 거라 동양인들이 그렇다는 대답을 하자 반문으로 그 시절에도 소를 많이 잡아먹었다는 말을 한다.

원제가 '비프'인 것. '유당 불내증'에 대한 질문. 동양인. 그러니까 동아시아인들의 특유의 '예' 문화. 우유를 잘 소화하지 못해서 제대로 된 변이 되지 못하고 설사를 하는 민족. 화내지 않고 참아야 했지만 끝내 소화시키지 못하고 분노해 버리다. 뭐 그런 건가. 

 

'대니 조'는 '에이미 라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하다. 절대적 가난 측면에서 봤을 때도 하층민에 더 가깝다. 굳이 인물들을 다른 계층으로 나눈 것은. 어떤 계층이어도 별 다를 바 없다는 면을 보려 주려는 설정이었을 거다. 

드라마가 하고 싶은 얘기 자체는 이해가 된다. 결국 결말 부분에서 둘이 정신이 혼미해지며 대니가 에이미처럼 되고 에이미가 대니처럼 되는 부분. 그것은 결국 둘의 모습이 한 사람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 같았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누구도 공감해주지 못했지만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다른 계층의 둘이 천생연분이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대니는 주변사람에게 착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나쁘게 말하면 '호구'에 가까울 정도로. 하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추악한 짓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대니는 에이미에게 "나도 너처럼 될 수 있을까."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대니는 신분상승 욕구가 가득하다. 그래서 동생이 먼저 좋은 대학에 가고 실패한 자기와 멀어질까 두려워 그런 행위를 했던 것이다. 망가뜨리고 게으른 동생을 질책하며 가스라이팅 하며 지낸 것이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로 둔 채. 

대니가 교회에 들어서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에이미와 한탕하고 나서 자기 자신이 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겠지만 그보다 더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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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 메이커>는 '김희애'와 '문소리'라는 배우들이 가지는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드라마다. 요즘에 넷플릭스 시리즈에는 그런 드라마가 많은 거 같다. 얼마 전 봤던 <길복순>도 전도연의 유명세가 없었다면 화제가 되기 조차 힘들었을 거다. 

 

<퀸 메이커>는 1화부터 큰 사건을 시작으로 <스카이 캐슬>과 같은 작법을 구사한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작은 아씨들>, <재벌집 막내아들>과 비슷한 소재와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른 점은 <퀸 메이커>는 '여성'을 강조하고 '노동자'의 연대를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야기 자체가 '오경숙'을 서울 시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보니 더 옳은 것을 얘기하고 싶어 한다. 

지금 당장 우리나라 정치판만 보아도 누구도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정치에 발을 들였던 소방관이 정치판을 떠난다는 발표를 하는 영상을 보았다. 어느 쪽도 정의나 세상살이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그 소방관의 말이 생각났다. 

 

당장 자신이 발 붙이고 있는 회사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황도희'는 오경숙을 만나고 난 뒤 그게 틀렸음을 인지한다. 그리고 그게 너무나 당연한 상식을 잊고 살아온 자신을 깨끗한 인권 변호사 오경숙을 위해 바친다. 그간 은성 그룹을 뒤치다꺼리하며 자기 손에 묻힌 피에 대한 사죄의 마음으로. 

 

결국 돈이 없으면 안 된다는 속물이 되는 나이가 된다. 누가 자신에게 1억을 준다면 구두 정도는 핥겠다고 우스개로 말할 사람이 도처에 널렸다. 그게 뭐가 창피하냐고 도리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고 말하겠지. 그들에게도 새치기가 나쁘다는 인식이 있던 도덕적 시절이 있었을 테고. 오래된 '슬기로운 생활' 같은 책을 굳게 마음에 두었던 때가 있을 테다. 

삶이 힘들어서. 외면했을지라도. <퀸 메이커> 같은 드라마를 볼 때만이라도 우리 마음의 '비상 경보기'는 켜진다. 그래, 오경숙이 말하는 '좋은 세상'을 위한 뜨거운 마음이 있었지. 왜 이토록 세상이 더럽고 망가졌는지. 누군들 그런 세상을 원하지 않을까.

깨끗한 도화지에 검은 점 하나만 생겨도 비난하기 바쁘다. 그걸 버티고 끝까지 살아남는 오경숙 같은 사람은 0.0001%도 안될 것이다. 그렇게 힘들다 그 길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 길바닥에 휴지 조각을 쉬 버리지 않으면서. 새치기를 하지 않으면서. 작은 것. 그런 것들부터 양심을 키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