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 (스포 有)
꿈속에서 어린 자신과 엄마를 찾다 깬 스즈메. 이모는 도시락을 싸주고 스즈메는 자전거를 타고 나선다. 내리막길을 달리고 남자 한 명을 만난다. 폐허를 찾는다는 그에게 마을 뒤편에 있는 곳을 알려준다. 스즈메는 왠지 그에게서 기시감을 느끼고 학교에 다 와서 다시 돌아선다.
남자가 폐허를 찾지 못할 거 같은 걱정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 거기다가 하울처럼 생긴 잘생긴 외모. 그를 찾다가 얕은 물에 덩그러니 놓인 문 하나를 마주한다. 남자도 '문'을 찾는다고 했다. 문을 열자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고 들어가려 하지만 들어갈 수 없다. 그렇게 문을 열어두고 학교로 돌아온 스즈메.
휴대폰으로 지진경보가 울린다. 학생들 모두 놀랐지만 약한 진도에 안심한다. 그때 창문 밖으로 거대한 물체가 보인다. 다른 친구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스즈메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폐허로 다시 달려간다. 열어 둔 문에서 괴상한 것이 새어 나오고 있고 남자가 문을 닫으려 애쓴다.
둘은 힘을 합쳐 문을 닫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다친 남자를 치료하기 위해 집으로 데려간다. 창문 밖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스즈메가 먹이를 주자 말을 하는 고양이. 그 고양이에 의해 남자는 의자가 되고 만다. 그렇게 고양이를 쫓으며 둘의 문단속 여정이 시작된다.
1. 괴물화된 지진
일본의 옆나라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에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는 사실을 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지진을 '미미즈'라는 재앙의 생물로 표현하고 있다. 뒷문으로 자신의 몸을 다 드러낸 미미즈는 기괴한 모습으로 하늘에서 떨어질 준비를 한다. 그 녀석이 쿵하고 땅에 몸을 떨구면 그게 곧 지진이다. 이야기의 초반부에서는 미미즈를 재빨리 제압하지 못해 마을의 지붕 기와가 떨어지기도 한다.
영화를 보다가 이거 일본에서 상영해도 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들에게 지진은 늘 도사리는 공포일 거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PTSD'를 자극하는 상상력이었다. 미미즈가 그야말로 괴생물체인 이유가 이해가 된다.
2. 공포의 기억을 어루만지는 '토지시' 소타의 문단속
"아뢰옵기도 송구한 히미즈의 신이여, 머나먼 선조의 고향 땅이여, 오래도록 배령받은 산과 하천이여, 경외하고 경외하오며 삼가 돌려드리옵니다!"
문을 닫을 때면 '토지시'인 무나가타 소타가 외는 일종의 주문이다. 열쇠가 빛나고 폐허가 된 마을의 뒷문을 잠근다. 문을 잠글 때 소타는 그 마을에 있었던 행복한 기억을 듣는다. 그때 마법의 열쇠를 꽂을 구멍이 나타난다. 이야기의 종반부에 소타는 기억들이 재앙의 기운을 누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열쇠는 그 마을의 따뜻한 기억인 것이다. 뒷문이 열리는 것은 지진 같은 재앙이 또 삶을 파괴할 거라는 공포심이 커질 때 그 틈으로 미미즈가 나오는 게 아닐까.
3. 여기와 저기,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문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그곳은 저승이다. 뒷문이 된 관람차에서 홀린 듯 이끌리는 스즈메를 말리는 소타는 그곳이 저승임을 알려준다. 도쿄를 지키고 있던 요석마저 뽑히며 미미즈는 가진 힘을 모두 개방하여 대도시의 하늘을 가득 메운다. 또다시 대재앙이 반복될까 두려운 스즈메는 의자가 되어버린 소타를 새로운 요석으로 봉인한다.
미안함과 슬픔에 잠긴 스즈메는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타의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할아버지는 소타를 찾겠다는 스즈메에게 죽음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묻는다. 스즈메는 망설임도 없이 두렵지 않다고 답한다. 죽고 사는 것은 단지 운일뿐이라며. 쓰나미에 마을이 쓸리고 엄마를 잃은 스즈메는 죽음에 초연한 듯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자주 답한다. '운'이라고 표현했듯이 재앙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불쑥 우리의 삶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저승을 그토록 아름답게 그린 이유. 가족을 잃거나 삶의 정착지를 잃은 자들은 마음이 꺾이면 죽음을 생각한다. 마치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고통이 사라진다고 믿는다. 죽음은 때로 그렇게 가고 싶은 땅처럼 느껴진다.
4. 그럼에도 내일을 꿈꾸면서 스즈메의 문단속
소타를 구하기 위해 십여 년 만에 고향으로 향하는 스즈메 일행. 지진을 느껴 차를 세우라고 하는 스즈메. 같이 내린 세리자와는 담배를 피우며 여기 참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자 스즈메는 여기가 이렇게 보기 좋은 곳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폐허가 된 고향땅도 실은 괜찮은 풍경으로 자연이 바꾸어 준 것이다.
스즈메는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자신의 문을 통해 저승으로 들어간다. 황폐화되고 불타고 있는 그곳에는 거대한 미미즈가 있고 봉인된 소타가 보인다. 스즈메는 소타를 향해 달리고 요석이었던 사다이진은 미미즈를 막으려 애쓴다. 이때 스즈메는 의자인 소타를 붙잡으며 사실은 죽음이 두렵다고 토로한다. 엄마가 죽어버린 사실도 싫고 그게 너무 무서웠던 어린 자신을 외면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즈메는 늘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거짓말했지만 이제는 사실을 말한다. 죽음이 두렵다고.
인간으로 돌아온 소타와 함께 돌아가려던 스즈메는 그곳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다. 울고 있는 자신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과 내일을 약속하는 스즈메. 이야기의 가장 처음 꾸었던 꿈속 '엄마'로 보였던 인물은 바로 스즈메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소타에게 기시감을 느낀 이유도 바로 미래의 자신이 과거의 네 살인 스즈메를 만났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나온 스즈메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담긴 자신의 문을 닫고 잠근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스즈메의 문단속은 마무리된다.
문단속은 단순히 재앙을 막기만 하는 '토지시'의 가업이 아니다. 폐허가 된 마을에서 떠난 사람들 마음속 도사리는 공포를 잠재우고 어루만지는 일이기도 하다. 불행한 기억과 과거의 아픔들로부터 결별하기 위해 자신의 문을 잠그는 일. 그 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길을 헤맸던 스즈메는 여전히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래서 뜬금없이 고향에 가겠다고 했을 때. 이모는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속에 있던 말이 튀어나왔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엄마보다 더욱 엄마처럼 걱정하고 길러낸 스즈메가 반항하고 자신의 마음을 민폐로 부담스러워하니 말이다. 쌓이고 쌓였던 오해와 갈등들을 제대로 풀지 않으니 스즈메의 뒷문 속이 불타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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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라는 생각이 든다.
1. 수미상관을 통해 이야기가 단단하다.
2. 일본이라는 나라에 도사리는 재앙인 지진을 '미미즈'라는 괴생물체로 잘 표현한 상상력.
3.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처럼 마냥 환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면서 개인의 아픔까지 얘기하는 것이 보편적면에서 우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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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타와 스즈메가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감정적 구멍. 개연성에 비판하는 평가들.
1.
소타를 단순히 인간 남성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힘들다. 소타는 '남자'가 아니라 문을 닫는 '토지시'다. 소타가 하필 스즈메 엄마가 남긴 유아용 의자로 변하게 된 이유도 그가 문단속을 하는 토지시기 때문이다. 폐허를 달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가문의 사람이 소타다. 의자에 입을 맞추는 것은 개구리 왕자를 사람으로 돌리는 것을 모티브로 한 것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고통에 입맞춤하며 안녕을 고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아픈 기억으로부터 작별인사를 하며 스즈메 자신의 뒷문을 잠그는 일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소타를 사랑하는 남성으로만 이해한다면 감정적으로 공감하기 힘들다. 소타를 스즈메의 뒷문을 닫는 '열쇠'로 받아들여야 한다. 스즈메는 자신의 뒷문을 통해 저승으로 들어가기 전 이모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러 갔다 올게."라고 말이다. 그 사랑하는 사람은 소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가장 치유받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네 살에 머물러 있는 스즈메기 때문이다.
2. 소타라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왜 목숨을 다 바쳐 협력하는지
스즈메는 소타를 처음 봤을 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을 느낀다.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이 알려준 폐허로 달려가서 그 문을 열게 된다. 그리고 그 문에서 거대한 재앙 '미미즈'가 나오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다친 소타를 치료하려 집에 데려온다. 그리고 고양이인 '다이진'이 저주를 걸어 소타가 의자로 변하고 만다. 그러니 모른 척할 수가 없이 함께 가는 게 영화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지는 않는다. 또 일이 커진 이유는 바로 스즈메가 요석을 뽑았기 때문이다. 더해서 중간에 소타가 2차 임용고시조차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더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소타가 교사가 되려는 사람이라는 점은 1번의 부족한 개연성을 좀 더 채워준다고 본다. 학생을 가르치고 아이들을 길러내는 교사라는 직업을 희망하는 자와 아픈 과거를 지닌 스즈메의 만남. 거기다가 일본 전역의 폐허를 달래는 '토지시'인 소타가 네 살의 스즈메를 치유하는 데 동행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개연성으로 보인다.
애니메이션 시작부터 스즈메는 꿈을 꾼다. 스즈메의 삶을 온통 사로잡는 불안과 궁금증이다. 대체 그 아름다운 풍경은 어디고 그 여자는 누군지. 스즈메는 엄마를 연신 외친다. 끔찍했던 네 살의 외로움. 스즈메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지만 누구보다 재난의 위협을 잘 안다. 거기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소타와 문단속 여행을 떠난다. 죽음을 제대로 두려워하고 더 이상 길을 헤매지 않으려고. 그게 스즈메가 목숨을 다 바쳐 요석이 된 유아용 의자를 뽑으려는 이유다. 그 의자를 뽑아내고 자신의 뒷문에게 네 살의 자신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해야 하기에. 삶 전체를 뒤흔드는 기시감에 언제까지 끌려다닐 것인가. 당신이라면 그 궁금증을 풀어내려 온 세상을 헤집지 않을까.
3. 왜 이모에게도 그 모든 사실을 끝까지 숨기나?
그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일이기도 하고 일일이 설명하는 게 귀찮기도 하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으로 그랬을 거다. 또 스즈메는 이 일이 그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을 것이기도 하다.
세리자와와 고향으로 가기로 했을 때 휴게소에서 이모와 스즈메는 속에 있는 말들을 꺼내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이때 드러나는 감정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스즈메는 늘 이모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작품 내에서 스즈메가 "내가 이모의 인생 한 부분을 빼앗은 건 아닌지."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모는 단순히 언니가 죽어서 스즈메를 거두고 키웠지만 12년이란 세월을 보내며 이제는 단순한 이모가 아닌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스즈메 역시 이를 잘 알지만 자신 때문에 이모가 연애도 못하고 자기를 보살핀다고 생각해 더 이상 민폐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모에게 연락하는 것을 생략하고 자꾸만 잘 곳이 있다고 거짓말하고 이제 '나도 혼자서 잘해' 같은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최근에 한국에서 방영된 <일타 스캔들>이라는 드라마에서도 같은 설정이 나온다. 엄마가 버리고 간 딸을 이모가 대신 키운다. 여기서 딸인 '남해이'는 이모인 '남행선'이 자신에게 주는 사랑을 성장하면서 부담스러워한다. 자신을 버린 엄마 때문에 이모는 국가대표도 그만두고 청춘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해이는 자신은 더 이상 민폐 끼치기 싫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해이는 자신에게 생기는 문제들을 최대한 혼자 해결하려고 하고 이모에게 슬픈 감정 같은 것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스즈메 역시도 그런 심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휴게소에서 너 때문에 청춘을 잃었다고 말하는 이모도 이해가 된다. 후에 이모가 그렇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단순히 네가 언니가 죽어서 키우게 된 건 아니라는 말. 그것은 우리는 더 이상 이모와 조카의 관계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스즈메가 이모에게 소타 얘기를 숨기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고 늦게 들어가거나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인가 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세세하게 얘기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자기 삶에서 찾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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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처럼 다짜고짜 몸이 바뀌는 작품보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앙 그것도 일본에 도사리는 지진을 잘 표현한 현실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계속 말했지만 애초에 수미상관형 이야기라서 잘 짜여 있는 이야기 구성이다.
몇 가지 더 억지스러운 비판이 있던데 '나무위키'라는 곳에. 아무래도 그곳은 진짜 들어주기 힘든 평가도 많은 듯하다. 스즈메의 체력이 너무 대단해서 몰입이 깨졌다는 일본 평론가의 평도 있다고 쓰여있는데. 기가 차다. 애니메이션에서 그런 것까지 신경 썼었나. <원펀맨> 같은 애니메이션처럼 주인공이 훈련하는 내용이라도 넣길 바라는 건가. 틀린 말은 아닌데 글쎄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개연성까지 챙기면서 이야기를 썼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진짜 별로인 애니메이션이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