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무용산책 과제
교양 수업이었다.
이름이 무용산책이라서 각나라의 무용에 대해 알아보겠거니 싶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무용 그 자체보다는 그 무용이 탄생한 배경을 공부하는 수업이었다. 그러니까 고전주의 발레 같은 것은 귀족들이 보는 것이었고 의상이나 동작이 정해져 있었다, 이런 식이었다.
말하자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삶의 방식이 달라졌듯이 무용도 변했다고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마지막 과제는 기억하기로 하나의 무용에 대해서 조사하고 거기에 대해서 글을 써보는 것이었다.
고백하자면 과제를 쓰고 퇴고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니까 '대충' 했다는 말이다.
대학 4년을 그렇게 살다보니 지금 이 신세가 된 것.
<과제 내용>
제목 < 참을 수 없는 무거움! 죽음에 대하여 >
1. 쉬 -
타국에서 살아 본 경험도 그렇다고 외국의 문화를 익히 공부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무겁다고 생각한다.
향년, 소천, 돌아가다, 떠나다, 올라가다, 별세 등. 죽음을 뜻하는 말이 다양하다. 그만큼 금기시 된다는 의미다. 단순히 누군가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 죽었어?” 라고 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다. 알고 있지만 이해되지는 않는다. 친구 심지어 부모님이 죽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수없이 받았다.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을 거고 어쩌면 자위나 섹스도 해버릴지 모르겠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죽음을 좀 고상하게 예우를 갖추자면 딱 이 정도다.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하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 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 ‘쉬’ ,<쉬!>, 문인수
가늘어진 오줌발처럼 움츠려드는 아버지. 애써 아들이 땅에 붙들어 매려 해도 휘청거리는 다리를 대신 받쳐 버텨도 도리가 없다. 가야 하므로 끝나 가므로. 조용히 그렇게 끝난다. 쉬! 하고.
2. 허무의 춤, 부토.
그런 점에서 부토는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가 있다. 하얗게 얼굴을 칠하는 분장이 몰개성을 나타냈다. 물론 지인의 죽음은 ‘특별성’을 지니는 구별 가능한 것이겠으나, 그 조차도 별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당연한 순리기 때문이다.
부토의 분장은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떠오르게 했다. 세상이 정해놓은 방식에 반항하며 자기만의 정의를 꿈꾸는 인물 조커. 그의 명대사는 “왜 그렇게 심각해? Why so serious?” 다.
1959년 일본 ‘히쓰카다 다쓰미’가 창시하여 ‘부토’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원자폭탄 폭격으로 패배한 점이 배경이 되었다. 초고농축 우라늄 에너지가 한순간에 머리 위에서 터져버렸을 때 인간은 어떻게 될까. 소리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형 조엘 코엔(Joel Coen)과 동생 에단 코엔(Ethan Coen). 이 둘을 우리는 코엔 형제라고 부른다. 코엔 형제가 감독한 영화 <시리어스 맨 A Serious Man>은 갑작스런 사고들로부터 고통 받던 남자가 모든 일이 해결되는 시점에서 오히려 처음에 괜찮았던 병원 진료가 잘못됐다는 전화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 ‘래리 고프닉’ (이하 래리)은 세 명의 랍비를 만나서 고민을 털어 놓는다. 그런데 어느 랍비도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인간사를 통달했다는 랍비조차도 말이다. 심지어 셋 중에서 가장 대단하다는 랍비는 래리를 만나지도 않고 비서를 통해 ‘생각하느라’ 바쁘다는 어이없는 답을 내놓는다.
영화는 상당히 평이하게 진행된다. 그렇다면 제목은 왜 ‘시리어스 맨’일까. 깨달음을 얻은 랍비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사로운 일들,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에 대해 안달복달 해도 답은 없다. 결말에서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의사로부터 다시 진료 결과에 대해 전화를 받게 되는 것처럼.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다. 알라 신도 위대한 책 탈무드도 인간의 심각하고 진지한 고민에는 관심이 없다.
<시리어스 맨>의 래리처럼 이런저런 일에 고민하며 살아도 갑자기 원자폭탄에 맞는다면 한 줌 재가 되고 만다. 당시 제 2차 세계대전을 막 겪은 일본인들의 심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사랑하고 아끼던 이들이 내일 만나기로 했던 지인들이 한순간에 소멸해버린 거다. 그들은 ‘아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신은 아랑곳 않고 대지진이며 태풍을 마구 부르리라.
일본의 부토가 하얀 분칠로 몰개성을 나타내는 이유가 이것과 같다고 본다. 겪고 보니 죽음이란 게 참 별 거 아니었다는 거다. 조사관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하는 유명한 일화 속의 말처럼 말 그대로 ‘펑’하고 사라진 거다. 바로 이런 ‘허무’한 감정을 춤으로 표현한 게 부토다.
일본은 마당에 산과 강을 가져다 놓는 축소의 조경 문화가 있다. 비단 그 뿐만 아니라 부채, 우산, TV 등 모든 사물을 축소하려 든다. 자연을 대상을 손 안으로 쥐려한다. 허무함에 빠진 일본인들은 죽음마저 삶의 공간으로 불러들이려 한 것이다. 한 인간의 삶을 몇 분짜리 무용으로 축약하여 표현하려한 노력이다.
무대 위의 무용수는 ‘누군가’를 상징하니 당연히 얼굴은 가면을 쓴 듯 하얗게 분한다. 복장은 수의 같기도 한 천 쪼가리에 기대고 때로는 꽃무늬가 새겨진 하늘하늘한 것을 입기도 한다. 춤사위는 고즈넉하고 절제된다. 짧게 폈다가 져버리는 ‘벚꽃 sakura’처럼 말이다.
3. 넘어진 자리에서 똑바로 일어서기
우리는 왜 그토록 죽음을 떠올릴 때면 마치 철학이나 하는 양 굴었을까. 뇌에서 척추로 신호를 보내지 못하는 덩어리를 그토록 신성하게 불렀을까. 추억, 기억, 과거. 언제나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있다는 믿음? 언젠가 ‘그리움’은 그 사람이 마음에 없기 때문이란 말을 들었다. 그립다, 라는 건 지나간 시간이나 갈 수 없는 공간을 다시 불러들이는 행동이다. 삶을 하나의 죽 그어진 선으로 본다면 그 중 어딘가 찍은 점 하나를 다시금 응시하는 거다. 다시 말해 지금, 여기 내 마음 속에 없는 것만 그리워 할 수 있다.
때로 그 풍경들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워하면 죽음 마주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죽음을 응시하고 내 손 안으로 가져와 쥐면 더 이상 그립지 않다. 이제 죽었다는 걸 실감하고 거기서부터 일어나 한발 짝 내딛는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은 이런 말을 했다. “넘어진 자리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넘어진 자리에서 발을 똑바로 땅에 힘주어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또다시 넘어지기 마련이다.
일본인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아픔과 후유증으로 죽음을 무용으로 승화했다. 사람들은 부토에 대해 ‘죽음의 춤, 어둠의 춤.’이라고 말하고 ‘허무주의’가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단순히 죽음을 표현하려 했다거나 으스스한 어둠 따위를 보여주려 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더더군다나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무주의에 침식됐다고는.
허무가 아니라 객관화라고 하자. 죽음을 처절하게 맞본 그들이 쌓인 시체더미를 차갑게 그러나 선명하게 바라봤다고 하자. 무겁게 여기던 주제를 삶으로 무용으로 내리고 끌어 들였다고 하자.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왜 그렇게 심각한지 묻는 거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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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있어보이려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오마주? 했다.
지금 다시보니 시인 문인수의 '쉬'는 글 내용에서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쉬'라는 시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허무나 다시 바라보는 의식적 행동과 주제가 같은지도 의문이다.
물론 시를 읽는데 답이 있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과 완전 상반되는 것은 나올 수가 없다.
이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끌어와서 죽음 앞에 모두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건 아니다, 라는 전제?를 만들고 '쉬'를 내 식대로 해석해서 논리를 세우려고 했던 것 같다.
내가 쓰는 글의 방식은 대부분 이렇다.
아무리 버티려고 애써도 쉬- 하고 우주가 조용 해지듯 사라지는 게 사람 목숨이지도 않냐, 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뭐, 완전히 논리가 어긋난 글은 아닌 듯 하기도 하다.
사실 '쉬' 라는 시나 <이방인>이나 <시리어스 맨> 모두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이방인>은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 지금은 그 내용도 가물하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렇게나 있어보이려고 인용하는 버릇은 고치려고 해야할 것 같다.